소쩍새는 올빼미 과에 속하면서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새다. 깊은 산 속에서 소쩍 소쩍 하고 우는 소리가 적막한 심산의 이미지와 어울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슬픔과 회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최효진의 춤 ‘소쩍새 울다’(2.11~12, 무용전문 M극장, 30분)는 이러한 새의 이미지에 충실하다. “저 새는 어제의 인연을 못 잊어 우는 거다. 아니다. 새들은 새 만남을 위해 운다. 우리 이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먼저 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 이렇게 시작되는 이면우 시인의 시(詩)가 작품의 텍스트다.
무대가 열리면 검은 옷의 여인이 등을 보이고 벤치에 앉아 있다. 반대편 무대 앞 쪽에 장독대가 놓여 있다. 크고 작은 세 개의 독이 옹기종기 둘러앉은 모양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인의 솔로(최효진)가 시작된다. 무대를 튕기듯 마디가 굵은 음향이 규칙적으로 울려온다. 고동치는 심장의 울림과 힘차게 뛰는 맥박의 운동을 묘사하는 듯하다. 음악과 어우러진 힘 있는 춤사위가 10분간 무대를 장악한다. 장독대로 다가간 여인이 독 안에서 붉은 색 커다란 망토를 끄집어낸다.
그녀의 추억이 모두 그 속에 담긴 듯하다. 등 쪽이 까만색 망사로 이어진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 셋이 차례로 등장한다. 한 여인이 독 속에서 진홍색 꽃잎을 한 움큼 씩 끄집어낸다. 꽃잎이 길 위에 뿌려지고 여인들은 꽃을 밟으며 춤추기 시작한다. 여인들은 소쩍새고 꽃잎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젊은 날의 아픈 추억들이다. 세 여인(박관정, 최진실, 최은진)이 만드는 크고 유연한 춤에서는 3인무가 아닌 세 개의 솔로를 동시에 보는 듯하다. 장중하게 무대 전체를 휘감는 김재덕의 창의적인 음악에서 에너지를 받은 듯 여인들의 춤은 흐느끼듯, 절규하듯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검은 옷의 최효진이 다시 등장한다. 어둠을 주조로 하던 조명이 명멸하는 사이 서정적인 노래가 무대를 감싼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빈 손짓에 슬퍼지면/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김필, ‘청춘’). 무용학원과 대학에서 무용교육자로서 꾸준한 행보를 계속하면서 자신의 춤에도 소홀하지 않는 최효진의 안무능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같은 장소에서 정은주의 춤 ‘붉은 가면의 진실’(2.18, M극장)을 보았다. 가면 속에 감추어진 여인의 진실을 욕망과 방황과 열정으로 묘사한 45분 솔로작품이다. 두 작품은 같은 듯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같은 것은 붉은 색과 검정 색이 몸의 앞뒤를 나누고 있는 긴 드레스 의상과 어두운 조명, 훌쩍 키가 큰 여인들이 펼치는 시원한 춤사위다.
음악의 사용과 드라마터지는 전혀 딴판이다.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정은주)의 춤과 ‘소리연구회 소리 숲’(김지윤), 두 단체가 만나는 무대에 내레이션(김지영)이 앞서 깔리면서 춤과 음악을 리드한다. 소리 숲의 음악은 피아노(이수연), 바이올린(김정수)과 피리(김지윤)로 구성된 특이한 3중주 형식이다.
놀라운 것은 슈베르트와 생상, 헨델, 쇼팽을 연주하면서 양악기와 국악기가 이루어내는 절묘한 음색이다. 국가무형문화재 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이수자인 김지윤이 중심에 있는 소리의 앙상블이 정은주의 열정적인 솔로 춤사위와 어울린다. 붉은 색과 흰 색의 폭 넓은 천이 십자 모양으로 무대 뒤쪽에 설치되어 있다.
어둠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그 뒤에서 한 여인이 등장한다. 부끄러운 듯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세상의 호기심으로 크게 열린 두 눈은 쉼 없이 반짝인다. 이화여대 무용학과와 캘리포니아 미술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을 졸업(MFA)한 정은주의 표정은 치열하고 장신에 긴 팔다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펼쳐내는 에너지가 인상적이다.
세상에 대한 커다란 욕망과 이를 움켜쥘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여인의 방황은 시작되지만 방황의 회오리에서 벗어날 때 여인은 작은 바람들에 손을 내민다. 음악은 경쾌해지고 편안해진 표정은 자유로운 춤사위로 변화한다. 붉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스스로의 주인이 된 여인의 진지함이 소극장 작은 무대 1,2층을 가득 채운 객석과 교감하면서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진 작품이었다.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주최,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주관의 ‘붉은 가면의 진실’이 2월 18일 M극장에서 공연됐다.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 안무가이자 현대무용가인 소은 은주의 솔로와 소리연구회 소리 숲 아티스트들의 라이브 연주가 함께 호흡을 맞춘 이번 공연은, 김지윤(피리), 김정수(바이올린), 이수연(피아노)이 연주에 참여했다.
외면으로 가려진 내면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는 ‘붉은 가면의 진실’은 전통악기와 서양악기의 조화, 현대무용과 내레이션의 조화가 돋보인 작품이다.
◇ 안무의 디테일 못지않게, 조명의 디테일이 눈에 띈 공연
‘붉은 가면의 진실’이 공연된 M극장은 관객석의 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무대를 가진 공연장이다. 동선과 안무의 다양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때, 관객들은 무척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그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소은 은주의 안무 못지않게 조명의 디테일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붉은 가면의 진실’은 손이 닿으면 사라지는 조명, 암전 후 밝아질 때 밝기를 달리한 조명 등 민감하게 느낄수록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 무대 연출이 주목됐다.
◇ 욕망·방황·열정의 순서, 시작과 끝이 오버랩된 구성
‘붉은 가면의 진실’은 내 안에 숨은 감정들이 하나, 둘, 셋, 넷 피어나 주인인 나 자신도 제어할 수 없게 되고, 나 자신까지도 삼켜버린 감정을 담고 있다. 나의 내면 감정은 붉은 가면이 돼 나를 뒤덮는데, 가면을 벗은 모습이 진짜인지, 내면에서 나왔기에 가면 자체가 진짜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붉은 가면이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 찾아가는 여정에 욕망과 방황, 열정이라는 3개의 테마가 나타나는데, 테마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테마의 순서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붉은 가면의 진실’ 리허설사진. 사진=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제공
욕망으로 시작했지만 방황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방황이 열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방황 후에 열정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고, 욕망이 열정으로 이어진 것인데 그 사이에 방황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붉은 가면의 진실’을 직접 관람하면 안무와 음악, 내레이션 모두 마지막에 처음 부분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열정이 욕망과 닿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열정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욕망, 방황, 열정이 하나의 링으로 구성돼 있어서 다시 욕망으로 돌아왔다면, 원위치로 복귀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거치며 감정은 하나의 시리즈처럼 축적됐다고 볼 수 있다. ‘붉은 가면의 진실’에서 반복을 보여준 마지막에 무대는 약간 변경된 것 또한 그런 이미지와 연결된다.
‘붉은 가면의 진실’ 리허설사진. 사진=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제공
◇ 하고 싶었던 말을 직접 전한 내레이션
‘붉은 가면의 진실’은 이지현이 대본을 쓴 김지영의 내레이션이 인상적이었다. 바람은 어차피 흩어질 것인데 큰 바람을 모아서 뭘 하겠냐는 등 ‘붉은 가면의 진실’은 하고 싶은 말을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한다. “이제 나는 바람의 주인이고, 바람은 나의 주인이 된다. 감정들이 오롯이 내 안에서 춤을 춘다”라는 표현은 무대 위의 안무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든다.
‘붉은 가면의 진실’의 내레이션은 현대무용을 어려워할 수도 있는 관객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추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단지 해설에 머물지 않고 무대 위에서 전달하지 못한 메시지의 빈 곳을 채우는 중요한 역할도 수행한다.
‘붉은 가면의 진실’ 리허설사진. 사진=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제공
‘붉은 가면의 진실’은 안무에 대한 즉석 리뷰이자 모범 답안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안무와 음악을 통해서 무대에서 전달했지만, 아티스트들은 내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한 것인지, 관객들은 제대로 느꼈는지에 대한 무척 궁금해하는데 내레이션을 통해 이런 간극을 좁혔다는 점이 눈에 띈다.
◇ 내면과 외면의 이미지를 안무로 표현한 소은 은주
태초의 대지 위에서 서있는 듯 소은 은주는 맨발로 안무를 펼쳤다. 붉은색 천과 하얀색 천이 크로스 된 세트는 내면과 외면의 이미지를 상징하며, 심플한 조명 또한 ‘붉은 가면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내면과 외면의 시공간을 은유적으로 전달한다고 제작진은 밝힌 바 있다.
‘붉은 가면의 진실’ 리허설사진. 사진=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제공
소은 은주의 옷은 붉은색과 하얀색이 아닌, 붉은색과 검은색이라는 것이 눈에 띄는데, 빠르게 움직이다가 멈추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며 입체감을 보여준다. 무언가 잡아당기려는 팔 동작은 무언가를 만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잡아당기려는 몸짓, 닿으려는 손길이 인상적이다.
손이 닿으면 사라지는 원형 조명, 넓은 사각 조명 안에서 강렬한 안무 등 소은 은주의 움직임은 가면을 벗으면 민낯이 나올지 또 다른 가면이 새로 나올지 궁금하게 만든다.
‘붉은 가면의 진실’ 리허설사진. 사진=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제공
◇ 내면과 외면을 표현한 안무, 동서양의 감정을 동시에 전달한 음악
‘붉은 가면의 진실’는 피아노 연주가 먼저 시작해 피리 연주가 그 뒤를 이었다. 음악 비중도 높은 공연이라는 점도 주목됐는데, 연주자들은 관객석을 바라보지 않고, 무용수를 바라봤다. 느낌과 타이밍을 주고받기에 좋은 배치로 여겨진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Op.100, 생상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헨델-할보센 파사칼리아, 그리고 쇼팽 에튀드 이별의 곡 등이 연주됐는데, 음악이 서스펜스를 강화할 때 피아노 소리는 타악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김지윤의 피리 소리는 연주를 피아노,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전체적으로 들으면 국악기 참여했다는 것을 특별히 인지하지 않게 하면서, 피리 소리에 집중해 들으면 내면의 진실이 피리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돋보였다.
2월 18일(토) 오후 6시 포이동 M극장에서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 주최,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주관의 정은주 안무·출연의 '붉은 가면의 진실'이 공연된다. 잔잔한 춤 이야기꾼 정은주는 경쟁사회가 추구하는 속도감과 장식적 비주얼을 우회하여, 춤 수행의 정도를 견지하고 있는 안무가다. 그녀의 춤은 간결하며 전통음악과의 협업을 통한 현대적 감성을 보여준다.
정은주는 이화여대 무용과, 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 MFA, 단국대 박사 출신의 현대무용가로서 '소리연구회 소리 숲' 연출가이며 서울공연예고, 서울예대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은 테드숀 리본 안무의 현대적 발취 '붉은 나비의 꿈', PAMS LINK 선정작 '바람의 합주' 'Mind Mirror' 'For What?' '해령진무' 등이 있다.
그녀의 신작은 외면으로 가려진 내면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작품이다. '붉은 가면의 진실, 그 여정을 걷다'는 부드러운 바람의 느낌으로 다가와서, 양파껍질처럼 벗겨지는 격정의 여정은 몸 시(詩)의 전형이다. 붉은 가면의 외면과 내면에 대한 시작과 끝이 오버랩 되는 구성으로, 욕망과 방황, 열정이라는 3개의 테마를 통해 붉은 가면의 진실을 찾아간다.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는 2013년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의 무용가이자 안무가 소은 정은주에 의해 창단됐으며, 2017년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에서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로 명칭을 변경했다. 헤케이브는 남방노랑나비의 학명인 유레마 헤케이브(Eurema Hecabe)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으로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현대무용을 나비라는 이미지로 해석해낸다.
'붉은 가면의 진실'은 총 3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섹션은 현대무용이 어렵다는 관객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하여 작품의 스토리라인을 내레이션으로 소개한 뒤, 테마를 표현하는 춤 연기자 은주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무가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안무에 사용되는 다양한 소품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붉은 색과 하얀 색 천이 크로스 되는 세트는 내면과 외면의 이미지를 상징하며, 심플한 조명 또한 '붉은 가면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한 내면과 외면의 시공간을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그 아래에 깔리는 음악과 색감의 대비는 정제한 여린 감정의 결들을 진설하고, 디테일한 동작들이 마음의 심중을 헤아리게 하는 모던한 설치미술의 느낌을 공유하게 한다.
전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 안무가이자 현대무용가인 소은 정은주의 독무와 소리연구회 '소리 숲' 아티스트들의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라이브 연주가 함께 호흡을 맞춘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Op.100, 생상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헨델-할보센 파사칼리아, 그리고 쇼팽 에튜드 이별의 곡 등을 김지윤(피리), 김정수(바이올린), 이수연(피아노)이 연주한다.
악가무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붉은 가면의 진실'은 현대적 몸짓과 서양 클래식 그리고 국악기인 피리의 선율이 더해져 동서양의 감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공연이다. 언제나처럼 '헤케이브 소은 컴퍼니'의 공연은 춤과 음악이 어우러져 시대의 단편을 성공적으로 이미지화 시킨다. 자극적인 열정을 흐르는 계곡의 물처럼 연연화(軟緣化)시킨 작업은 깊은 인상을 준다.
공연의 다른 한 축, '소리 숲'은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김지윤 대표를 주축으로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로운 소리를 추구하는 모임으로 2014년 3월 창단됐다. 소리 숲은 서양악기에 맞춰 작곡되거나 편곡되는 퓨전 음악이 아닌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궁중음악 및 민속음악과 서양악기의 합주를 통해 소리 숲만의 음악을 표현해낸다.
이 두 단체의 만남은 때로는 무용의 몸짓으로 음악을 풀어내고 때로는 음악의 선율이 무용을 이끌어 나감으로써 대중들에게 자유로운 현대무용의 움직임들과 동서양 음악의 컬래버보레이션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예술 장르로 경험하도록 한다. 늘 기대감을 부풀리며 궁금증을 자아내었던 그들의 공연, '붉은 가면의 진실'은 춤이 균제의 비중을 더 많이 차지한다.
현대무용가 소은 정은주와 서울대에서 피리연구로 국내 피리 박사 1호인 김지윤 대표는 실력을 겸비한 '소리 숲'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2016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기획공연인 금요공감에서 전석매진을 기록하며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바 있다. 관객들을 들뜨게 하지 않고, 고품격 공연의 정수를 보여준 이번 공연이 타인의 취향에도 맞을 것으로 생각된다.
슈베르트의 ‘들장미 D.257, Op.3-3’은 피아니스트 이수연, 바이올리니스트 김정수와 함께 노은아가 해금을 연주하였다. ‘들장미 D.257, Op.3-3’은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슈베르트의 가곡이다.
‘들장미 D.257, Op.3-3’은 바이올린과 해금이 현악부분을 번갈아 연주하기도 하였다. 바이올린과 해금이 만드는 다른 느낌은 곡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였고, 특히 해금은 애절함을 진하게 느끼게 만드는 선율을 전달하여 주었다.
전통의 악기가 애절한 한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더 적합한 것이라는 생각을 ‘들장미 D.257, Op.3-3’에서는 하게 되었었다. 해금이 연주에 참여하지 않은, 영화 <미션>의 OST인 ‘넬라 판타지아’에서는 이전의 곡에서 해금이 담당하였던 애절함을 바이올린이 맡아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소리의 숲 길>은 동서양 악기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너무 강한 선입견을 없애는데에도 도움을 준 공연이었다. 애절함을 표현하는 악기를 해금과 바이올린이 모두 맡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음악적 표현으로 확대되면서, 소리 숲이 추구하는 원곡 연주의 음악적 매력의 개연성과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감동에 대한 실감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페라의 아리아, 우리 가곡 등 성악과 어울린 <소리의 숲 길>
<소리의 숲 길>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OST인 ‘All I Ask of You’는 피리, 피아노와 함께 바리톤 김종표의 성악으로 만들어졌다. 피아노와 바리톤은 익숙한 조합이지만, 국악기 피리와 바리톤은 궁금한 조합이었다.
김종표는 맑고 부드러운 바리톤으로 테너적 느낌도 가지고 있었다. 피리 연주자인 김지윤을 상대배역처럼 대하는 김종표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도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목소리 좋은 김종표의 노래를 더 듣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 가곡 ‘그리운 금강산’이 피리, 피아노의 연주와 함께 펼쳐졌다. ‘All I Ask of You’에 이어진 ‘그리운 금강산’은 굉장한 컬래버레이션늘 만들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공연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서로 더 잘 어울리고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분위기와 느낌으로 생각된다.
<소리의 숲 길>은 앙코르 연주시간에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알려주어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앙코르곡은 오페라 <카르멘>에 나오는 아리아로 진행되었다.
무제한의 사진, 비디오 촬영권을 획득한 관객들은 앙코르곡에서 어느새 스스로 리듬에 맞추어 같이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하였다. 관객들을 무장해제시킨 <소리의 숲 길>의 방법은 돋보였으며, 바리톤 김종표가 올레를 외치며 무대의 불이 꺼지고 공연을 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리의 숲 길>은 성악이 우리의 전통악기와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창작 오페라 <쉰 살의 남자>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서양 악기로 연주하면서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외국인 관객과 젊은 층의 관객, 그리고 어린 관객까지
<소리의 숲 길>에는 외국인 관객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 주목되었다. 안무를 맡기도 한 <소리의 숲 길>의 정은주 연출은 공연에 대한 안내를 우리말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설명하여 관객들의 환호를 받기도 하였다.
<소리의 숲 길>의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연주를 들으면서 서양 사람들의 귀에는 어떻게 들릴까 궁금하였는데, 어쩌면 우리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소리보다 서양의 소리에 더욱 익숙해져있고, 서양 음악에 맞추어져 느끼도록 경험적으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리의 숲 길>은 외국인 관객들뿐만 아니라, 젊은 층의 관객들도 많았고,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공연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린 아이들 관객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그런 면에서 볼 때 <소리의 숲 길>을 비롯한 우리의 소리가 외국의 관객들에게도 호응을 얻으려면, 우리의 소리에 대하여 우리나라 관객들이 어떤 면에 감동을 받고 열광하는지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어린 관객들은 부모를 따라서 풍류사랑방의 공연을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전통의 소리가 너무 싫지는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전통의 소리가 가진 아름다운 음악적 끌림을 더욱 순수하게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2016년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 기획공연 금요공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우리소리연구회 소리 숲(이하 소리 숲)의 <소리의 숲 길>이 지난 5월 13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공연되었다.
<소리의 숲 길>은 민요과 궁중 음악, 우리 가곡과 서양의 가곡, 영화 OST, 뮤지컬 OST 등으로 국악을 더욱 친근하고 즐겁게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무대로 만들어졌다.
<소리의 숲 길>은 국악기인 피리와 해금과 함께 피아노, 바이올린, 드럼이 연주에 참여하였고, 바리톤 성악가의 노래와 현대무용이 어우러져서, 5월의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화사하고 잔잔한 숲 길의 소리를 그려냈다. 본지는 오늘부터 이틀에 걸쳐 <소리의 숲 길>에 대하여 공유할 예정이다.
퓨전 음악이 아닌, 궁중 음악과 민속 음악을 우리 전통 음악 원곡으로 연주하다
소리 숲은 서양 악기에 맞춰 작곡하거나 편곡한 퓨전 음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우리 전통 음악의 품안에서 궁중 음악과 민속 음악, 그리고 서양의 음악을 원곡으로 연주하려는 취지를 가진 단체이다.
<소리의 숲 길>은 국악기와 서양 악기의 합주로 공연이 이루어지지만, 서양 악기로 전통 음악을 연주할 때와 국악기로 서양 음악을 연주할 때 모두 원곡에 충실하게 연주한다.
소리 숲이 편곡으로 이루어진 퓨전 음악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양 악기는 서양 음악에 어울리고, 전통 악기는 전통 음악에 어울린다는 편견을 없애는데 도움을 준다.
퓨전 음악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동서양 악기의 조합으로 소리 숲이 만들어내는 원곡의 묘미는, 동서양 악기가 같이 연주될 때 퓨전 음악을 더욱 자주 들을 수 있는 현실에서, <소리의 숲 길>에서 원곡이 가진 매력을 편곡 없이 악기의 변화로 독특하게 해석해낸다는 점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음악적 만족을 가져다준다.
소리를 리드하는 피리와 무대를 채우는 안무
10개의 프로그램 중 <소리의 숲 길>의 첫 곡은 ‘봄의 소리 숲 길 – 5월의 바람’이었다. 어둠 속에서 최승현은 대북을 치면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김지윤이 국악기 피리를 연주하였고,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 대표인 정은주는 현대무용으로 5월의 바람을 소리의 몸짓으로 표현하였다.
‘봄의 소리 숲 길 – 5월의 바람’은 전통무용의 느낌도 곁들여진 현대무용이 함께 하여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을 함께 하는 무대였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대북소리로 마무리하였는데, 소리를 리드하는 피리 소리와 무대를 채우는 안무가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소리의 숲 길>은 작은 국악기인 피리가 얼마나 소리의 공간을 창출해내는지 보여주기도 하는 시간이었는데, 경기 민요 ‘태평가’에서도 그런 느낌은 이어졌다. ‘태평가’는 애절함이 박자감, 리듬감을 타고 흘렀는데, 듣기 편하게 연주하면서도 연주의 본질을 유지한다는 점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다.
국악기 피리는 작은 악기인데, 서양의 큰 관악기가 내는 풍성한 소리를 <소리의 숲 길>에서 보여주었다. 악기의 힘인지, 연주된 곡이 포함한 장점인지, 연주자의 능력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피리 소리가 가진 매력을 <소리의 숲 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절제하는 드럼과 피아노는 우리의 전통적인 타악기의 느낌을 준다
<소리의 숲 길>의 ‘태평가’ 연주에 사용된 드럼은 전통적인 타악기의 느낌을 주기도 하였다. 록밴드의 음악에서의 드럼이 아닌, ‘태평가’에서 절제하면서 호흡을 맞추는 드럼은, 피리와 해금이 만드는 전통적인 소리를 모드 전환하여 현대적으로도 어울리는 소리로 들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소리의 숲 길>은 피아노의 선율악기적 느낌과 더불어 타악기적인 느낌도 경험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가볍게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는 부분에서는 피아노가 타악기적인 느낌을 가지고, 전통 악기들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해령진무’는 현대무용과 함께 피아노의 단독 연주로 진행되었는데, 피아노가 있는 부분만 제외하고 무대는 어두워지고, 관객석이 환하게 밝아진 상태에서 관객석에서부터 정은주의 안무가 진행되었다. 관객석 안으로 들어간 안무는 표현의 제약이 따를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정식 무대만큼은 아니어도 풍류사랑방은 구조상 충분히 많은 표현이 가능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의 무대에서 관객들이 방석을 깔고 앉아서 공연을 보고 관객석에서 공연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새로운 감동을 주게 될지, <소리의 숲 길>을 보면서 상상하게 되었다.
‘해령진무’에서 피아노가 독주를 할 때에도 보통 독주를 할 때처럼 피아노의 뚜껑을 높이 열고 연주하지 않았는데, 풍류사랑방이 가진 자연 음향 공연 환경이기 때문에 소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점은 바리톤의 성악이 함께 한 <소리의 숲 길>의 후반부에서 더욱 강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현대무용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을 동원해 새로운 미(美)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주된 모티브는 '자유로움'. 하지만 기초가 없다면 자유로움의 표현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헤케이브 현대무용 기본 안무(중급)'는 현대무용의 기본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특정 동작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기본 움직임을 통해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013년 나온 '주니어를 위한 헤케이브 기본 안무'와 연결되는 시리즈다. 헤케이브란 자유로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인 나비 중 노랑남방나비 학명 'Eurema Hecabe'에서 명칭을 딴 것이다.
'헤케이브 현대무용 기본 안무(중급)'는 모두 12개의 움직임으로 구성돼 있다. 크게 '서서 하는 스탠딩'과 '움직이는 스탠딩 리드'로 나뉜다. 헤케이브 라이즈를 시작으로 헤케이브 윈드 스카이, 헤키이브 플라잉 등 오랜 시간 현대무용에서 사용됐던 동작을 체계화시켰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순서별 동작이 사진으로 표현돼 있어 쉽게 따라 해 볼 수 있다. 현대무용을 통해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오랜 시간 교육현장에서 강의해온 저자가 현대무용이 시작된 이사도라 던컨부터 다양한 무용사조를 거치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대무용가들의 업적과 무용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 작품을 조명하며 21세기 현대무용의 비전을 제시한 도서이다. 저자는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 및 현대무용수로 활동하며 체득한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무용학 박사로서의 이론에 대한 깊은 안목으로 현대무용의 기본에서부터 고급단계의 교본을 꾸준히 출간해 왔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과 무용전문잡지 [몸]지에 연재된 글을 재편성하여 새롭게 출간된 이 현대무용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명한 책은 현대무용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목차
Chapter 1 - 현대무용 1세대 - 이사도라 던컨, 자유의 표현을 외치다 - 대니숀, 최초의 현대무용 학교를 만들다
Chapter 2 - 현대무용 2세대 - 마사 그레이엄, 심리학적 표현의 현대무용 - 도리스 험프리, 찰스 와이드먼 그리고 호세 리몽의 인연 - 다양한 인종의 특성에 관심이 있었던 레스트 호튼 - 무용을 통한 힐링의 삶, 안나 하프린
Chapter 3 - 현대무용 3세대 - 머스 커닝엄, 움직임 자체의 의미로 말하다 - 알윈 니콜라이, 오즈의 마법사로 불리다
M극장 ‘춤과 의식전’에 상제된 테드 숀 리본 안무의 현대적 발취, 정은주 안무의 『붉은 나비의 꿈』은 현대무용의 역사적 관점에서 재해석 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초, 새로운 의식의 춤으로 현대무용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현대무용 최초 남자무용수 테드 숀의 ‘리본’ 안무의 흑백 비디오 자료가 춤 철학자 정은주의 시야에 포착된다.
고즈넉한 20세기의 풍경, 리본을 들고 춤추는 남자, 테드 숀의 흑백영상이 투사된다. 가벼운 울림으로 다가오는 강하고 분명한 현대무용의 새로운 조형에 대한 선언이다. 붉은 탑 조명 안에서 춤추는 여인, 정은주가 독무로 추어내는 리본 댄스는 대 스승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보헤미안의 모습이다. 음악 없이 침묵 속에 작은 움직임이 모여 변화를 이루어내는 단계이다.
정은주는 현대무용의 다양한 표현영역에 포함된 리본과 몸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전개시킨다. 그녀에게 그 과정은 나비의 환태로 나타난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 나비가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 나비가 되기 전까지의 긴 기다림, 날개가 생기는 나비, 나비가 되어 현실에 적응하는 나비,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그녀의 리본과 함께 표현된다.
경쾌한 선율이 번지면서 탑 조명 안으로 들어오는 하이 키 라이트, 정은주는 테드 숀의 분신이 되어 리듬체조 선수 같은 몸짓으로 섬세함과 굵은 선을 연기한다. 독백은 리본 댄스에 대한 경배가 된다. 리본 댄스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조형은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 출신인 정은주에 의해 최적의 조합을 이룬다. 제자리를 벗어난 그녀는 다시 붉은 탑 조명 사이를 오간다.
20세기의 춤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춤은 서양의 현대무용에 동양인의 문화와 정서가 결합되어 새로운 움직임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녀가 그리는 나비는 붉다. 열정을 잉태하는 나비이다. 구속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까칠할 정도의 냉정한 머리를 지닌 나비의 자태를 그려 나아가는 모습은 노자, 장자의 나비와 다를 것이 없으나 뜨거운 가슴을 지닌 나비이다. 나비가 되기 전의 애벌레의 기다림과 고난 부분을 하얀색 리본과 함께 안무로 구성하고, 이후 나비가 되면서 매여져 있던 리본은 풀리며 나비를 표현한다. 리본은 무엇인가를 제지하고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활용된다. 그녀는 리본을 풀면서 사회나 제도, 현실을 옥죄고 있는 무엇인가로부터의 압박이나 구속에서 자유로워짐을 표현해낸다.
플레인과 탑을 오가는 조명, 음악이 고조될수록 조형의 감도는 높아지지만 또한 선구자들이 겪는 고독이 비쳐진다. 상상이 불어오는 너른 들판에서 리본 없이 춤을 추는 여인, 음악이 멈춰서고 열린 무대에서 햇살(HKL)이 비쳐온다. 새로운 춤이 탄생한 것이다. 나비의 탄생이다. 나비와 리본 춤을 병치시키면서 근대의 풍경은 부드럽고 강하게 각인된다.
그녀가 의미 규정으로 내세우는 세 개의 탑 조명은 애벌레에서 성충,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부가적으로 표현한다. 드뷔시, 에릭사티, 필립 그라스와 성신여대 겸임교수이자 작곡가인 조윤정의 ‘여름비’와 ‘여명’이 음악으로 사용된다. 의상은 하얀색으로 레이어가 살짝 겹쳐서 감싸있는 애벌레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헐렁하고 편안한 튜닉 스타일로 자유로운 나비를 상징한다.
느린 걸음으로 등을 보이며 걸어가면서 공연은 종료된다. 정은주의 모습은 마음속 테드 숀을 흠모하는 열정과 엄숙함이 공존함을 입증한다. 그녀가 어떤 전의를 불태우는지는 몰라도 정은주는 찬 아침과 뜨거운 밤으로 번갈아 담금질하며 그 뜻을 기리는 여전사이다. 그녀의 『붉은 나비의 꿈』은 조택원이나 최승희의 초창기 춤 기록을 발견한 것 같은 흥분이 이는 공연이다.
정은주, 따스하고 냉정함을 동시에 소지한 춤꾼이다. 그녀는 이화여대 학사,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원(CalArts) 석사, 단국대에서 무용학 박사를 취득하고 단국대, 서울공연예고에 출강하고 있다. 그녀는 늘 싱그러운 꿈을 꾼다. 훤칠한 키에 싱겁지 않고 자기 안무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은 귀감으로 삼아야할 현대무용가의 덕목이다. 그녀의 연구에 경의를 보낸다.
지난 주 포이동 M극장에서 공연된 『바람의 합주』(The Wind's Ensemble)는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젊은 예술가들, 문화예술기획 ‘소리 숲’ 주최로 우리소리연구회 ‘소리 숲’,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가 한마음으로 우리나라의 전통국악과 서양 클래식 음악 그리고 무용을 대중들에게 소개하고, 국제교류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기획된 공연이었다. 전통음악의 품안에서 그 깊이를 찾아가는 단체의 바람직한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소리를 선사하는 피리, 태평소, 해금과 함께 피아노, 바이올린, 바리톤, 드럼 그리고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무용의 몸짓으로 풀어낸 무대였다. 그들만의 향기롭고 신선한 바람을 그리는 8개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바람의 합주』 역시 퓨전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진정한 소리와 몸짓을 찾아가는 무대였다.
이번 공연의 두 축은 ‘우리소리연구회 소리 숲’과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이다. ‘우리소리연구회 소리 숲’은 우리민족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로운 소리를 추구하는 모임으로 2015년 3월에 창단되었다. 소리 숲은 서양악기에 맞춰 작곡되거나 편곡되는 퓨전 음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음악의 품안에서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을 서양악기와의 합주를 통해 소리 숲만의 음악을 표현하고자 하는 단체이다.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는 2013년 리듬체조 국가대표 출신의 무용가이자 안무가 정은주에 의해 창단되었다. 헤케이브는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현대무용을 나비라는 이미지로 해석, 노란남방나비의 학명인 유레마 헤케이브(Eurema Hecabe)에서 그 명칭을 따온 것이다. 몸을 통해 다양한 표현을 시도하는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는 특히 인간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안무에 사용되는 다양한 소품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있는 단체이다.
여덟 편의 작품은 1. 『모던 세븐』(Modern Seven, 무용) 2. 『수제천』(Sujecheon, Court Music) 3. 『오 나의 태양』(O sole mio, E. di Capua) 4. 종묘제례악 정대업지곡 중 『영관』(Yeonggwan, Royal Ancestral Ritual Music) 5.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 (F. Schubert, Der Lindenbaum in der Winterreise) 6.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 Op. 19,M. Ravel) 7.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Piano Sonata No. 14 in C#minor, Op. 27-2(L. v. Beethoven) 8.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Opera Carmen, Toreador Song, G. Bizet, 무용)이다.
이들 작품에 대한 인상을 피력해본다. 주도하는 악기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며, 작품마다 변화하는 남녀 구성의 비율, 전통악기와 서양악기의 혼합, 악기와 춤의 만남, 극장 구조에 따른 집중과 몰입, 사물놀이악기를 배제한 전통악기 피리, 해금, 태평소를 사용한 협연, 곡목마다 조명이 투입되고, 곡배치 등 연출력이 돋보이고, 여유와 즐김으로써 관객과 하나가 된 공연이었다.
『모던 세븐』은 강렬한 태평소 사운드를 바탕으로 드럼과 함께 경쾌한 춤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즉흥성이 강한 태평소의 시나위 선율과 드럼의 다양한 리듬비트, 여기에 스트리트댄스 장르인 얼반, 힙합, 왁킹이 현대무용과 접목, 역동적인 에너지를 풀어낸 작품이다. 전통음악을 흡수한 춤은 시선, 손동작, 스피드로 분위기를 압도하며 점프, 롤링으로 관심을 끌며, 남성 3인, 여성 1인의 4인무는 기본기에 충실하며, 질식시킬 듯한 젊음의 끼를 발산한다.
바람의 합주-수제천
2. 『수제천』 바이올린(최정현), 피리(김지윤), 해금(이강산)
정악의 백미(白眉) 『수제천』, 원곡인 합주곡은 삼국시대 백제노래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는 궁중무용 반주로 쓰였다. 『수제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피리의 주선율이 멈춰질 때도 일부 악기가 쉼 없이 연주되어 마치 곡 전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는 점이다. 이번 공연에는 피리와 해금뿐 아니라 바이올린이 함께 연주되며 서로의 선율을 주고받는 조화로움을 시도하였다. 순서대로 자리한 3악사는 중간 정도의 조명에 그윽한 궁중음악 연주로 동현(해금)과 서현(바이올린)의 만남이라는 신비감을 자아내며, 그 사이를 파고드는 피리 연주로 간절한 소원을 담아 청아하고도 애잔한 선율을 끌어내었다. 조명은 각 파트의 연주자가 주인공이 되게끔 하였고, 조명의 붉은 빛은 황홀에 이르게 만들었다.
바람의 합주-오 나의 태양
3. 『오 나의 태양』 바리톤(김재일), 피리(김지윤), 피아노(임연주)
『오 솔레 미오』는 나폴리의 작곡가 디 카푸아(E. di Capua)에 의해 19세기 말 작곡된 곡이다. 나폴리 출신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목소리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되었으며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의 전통악기인 피리 소리를 더해 감미로운 선율을 전한다. 피리가 선도하고 피아노가 기본 악기로 쓰인 이 작품은 피리의 존재 가치를 절대적으로 부각시킨다. 이태리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부른 김재일의 노래는 호박, 노랑, 보라색 조명의 도움을 받아 여유와 평정심을 보여준다. 피리악사와 가수가 완전한 호흡을 이룬 흥미로운 곡이었다.
바람의 합주-영관
4. 종묘제례악 ‘정대업지곡’ 중 『영관』 태평소(김지윤), 피아노(임연주), 해금(이강산)
종묘제례악은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에 쓰이던 음악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왕들의 무공을 찬양하는 ‘정대업지곡’ 중 『영관』 이 연주되었다. 전통악기 이외에 피아노의 선율을 더해 서양악기가 우리나라의 궁중음악에서 어떻게 조화로움을 줄 수 있는지 느껴볼 수 있다. 이번 곡에도 조명은 연기자가 되어 세 악사를 비추며, 장중과 품격을 보조하며, 연주 악기의 장점을 골고루 보여준다. 정은주 연출의 세심한 배려가 도처에 깔려있음을 인지시켜주었고, 국악의 고품격화의 기본을 보여주었다.
바람의 합주-보리수
5.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 바리톤(김재일), 피아노(임연주), 해금(이강산)
『보리수』는 1927년에 작곡된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의 24곡 중 5번째 곡이다. 연가곡의 배경은 눈 덮인 겨울의 황량한 벌판과 매섭게 불어오는 북풍, 얼어붙은 시냇물, 잎이 다 떨어진 채 서 있는 나무 등이다. 현제명 작곡의 ‘그집앞’ 독일판이다. 지나간 사랑의 자취를 보리수에 담아 표현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곡이다. 이강산의 해금이 아리게 심연의 슬픔을 연주해내면 격정으로 덜려드는 피아노가 달려오고 하이키라이트의 도움을 받아 바리톤 김재일은 리트(Lied)의 매력을 발산한다. 민요풍의 노래의 의미를 따라 듣다보면, 진한 사랑의 여진을 만날 수 있다. 그 쓸쓸한 방황, 미세한 떨림으로 다가오는 감정을 연기해내는 김재일은 저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완벽한 연주와 작은 공간에서 퍼져 나오는 노래는 진한 감동을 연출한다.
바람의 합주-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6.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바이올린(최정현), 피리(김지윤), 피아노(임연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889년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 작곡가 라벨이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에서 영감 받아 작곡되었다.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이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피아노, 바이올린과 전통악기 피리를 더해 여인 삼중주로 연주되었다. 바닥조명은 심리묘사를 이끌어 내고, 가을의 서정으로 번진 연주는 기교와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평범한 멜로디와 완벽한 고전주의적 화성으로 현실에서 유리된 듯한 몽환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람의 합주-월광 소나타
7.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피리(김지윤), 피아노(임연주), 해금(이강산)
『월광 소나타』는 고요하면서 단순미와 균형을 특징으로 하는 곡으로 자유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피아노 선율에 더해진 피리와 해금의 소리로 곡 제목처럼 호수 위에 떠있는 청아한 달빛이 빛나는 풍경을 표현한다. 조명은 보라색을 사이에 두고 시각과 음의 교차의 묘미를 보여준다. 집중도를 높이며 완벽한 음악 공간을 확보한 뮤지션들은 서로의 영역을 보완해가며 완벽한 앙상블을 이룬다. ‘바람의 합주’에 어울리는 테크닉들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연주자들의 고고한 예술정신을 드높인다. 연주는 보랏빛 향기로 흩어지고 그윽한 향에 취하도록 마무리를 이끈다.
바람의 합주-투우사의 노래
8.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바리톤(김재일), 피리(김지윤), 피아노(임연주), 현대무용(정은주)
‘투우사의 노래’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Carmen)』 에서 주인공 돈 호세의 연적이자 스페인 최고의 투우사 에스카미요가 열광하는 팬들에 둘러싸여 호방한 투우사의 삶을 노래하는 아리아다. 매우 경쾌하면서도 중후한 이 곡은 투우사의 기백을 강하게 나타내는 곡으로,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한 투우사의 기백 속에 존재하는 내면의 순수함과 절제를 몸의 움직임으로 함께 표현한다. 피리가 선도하고 피아노, 노래가 따른다. 연주와 노래가 진행되는 가운데 백색의 긴 원피스 차림으로 정은주가 등장하고 선 굵은 독무를 추어낸다. 자신감을 보이며 진지함과 품격으로 풀어낸 춤은 연주와 조화를 이룬다.
나뭇잎이 색깔을 입는 가을날, 겨눔이 아닌 나눔과 어울림으로 격조있는 연주와 춤을 감상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아티스트들은 위대하다. 그들의 작품이 완벽하면 기쁨은 배가된다. 그들은 철새처럼 겨울로 향해 긴 여운을 남기며 떠나 갈 것이지만, 그들이 남긴 ‘빛나가나 반짝이는’ 모습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람의 합주』는 느낌표를 남긴 공연이었다.
[출연진] 김지윤(피리) l 서울대 음악박사, 우리소리연구회 소리 숲 대표 최정현(바이올린) l 서울대 음악박사, 안양대학교 교수 김재일(바리톤) l 서울대 석사, 독일 뒤셀도르프 로버트 슈만음대 졸업 임연주(피아노) l 단국대학교 졸업, 서울 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역임 정은주(안무, 연출) l 단국대 무용학박사, 헤케이브 정은주 컴퍼니 대표 이송현(작곡) l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이강산(해금) l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과정, 동아콩쿠르 금상수상 최승현(드럼) l 한서대 대학원 석사수료, 2014 20‘s ArtFasta 우승 김윤진(무용) l 서울공연예술고 재학 한우열(무용) l 서울공연예술고 재학 이진욱(무용) l 서울공연예술고 재학 정동주(무용) l 서울공연예술고 재학